노진아 / 말(末)종으로 역 진화 하는 미(未)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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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
노진아 전 | 1.4-1.13 | 한전아트센터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가슴이 뻥 뚫려있는 여자 아이의 모습은 구불거리는 뒤의 기(氣) 패턴과 더불어 때 이른 인간의 죽음을 떠오르게 한다. 제대로 피기도 전에 산화한 아이는 움직이는 산호초나 버섯무리처럼 아우성치는 미소(微小) 인간들의 묵시록적 이미지와 연결된다. 어떤 이유로 죽어버린 인류는 ‘미(未)생물’(작품 제목)로 부활했다. 관객 앞에 무리지어 움직이고 있는 미생물들은 또 다른 작품과 연결 지어 보면 확대 이미지이다. 그것은 현미경 아래에 움직이는, 곰팡이 닮은 형태를 고배율로 확대해야만 보이는 인간 군체의 모습과 같다. 전시장에 인터랙티브 설치나 단채널 비디오로 보여지는 작품들은 상호연결 되면서 스케일과 차원의 도약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3차원 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기준적 시점이 무시되어 있다. 현미경 아래 구물구물 움직이는 것은 배양 접시에 놓인 곰팡이류 같지만, 실은 철가루를 자석으로 움직인 장면들이다.
그것들은 배후의 보이지 않은 힘에 이끌려 끊임없이 이합집산 하는 중이다. 노진아의 작품에서 무기물과 유기물, 종들 사이의 차이는 가변적이다. 미생물들은 공격적인 금속문명의 잔해에서 가까스로 생존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또 다른 인간형으로 보인다. 진화는 언제나 보다 나은 것을 향한 진보–가령 단순성에서 복잡성으로, 저 생산력에서 고 생산력으로의 발전–을 의미해왔다. 진보는 완전을 향한다고 간주된 것이다. 그러나 브루스 매즐리시는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라는 부제가 붙은 책에서, 다윈의 진화론에서 말한 ‘완전’이라는 어휘는, 단지 어떤 종이 생태계에서 차지할 위치에 잘 적응한 상태라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강조한다. 즉 완전은 단순히 생존을 의미한다. 환경의 변화는 종의 생성과 소멸의 근본원인이 되므로, 진화는 거꾸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연 선택은 어떤 기관을 퇴화시킬 수 있다.
노진아의 작품에서 새로운 종의 인간은 나노 단위의 스케일로 크기를 대폭 줄였고, 머리를 빼고 모든 기관을 하나의 몸통으로 환원시켰으며, 개체가 아닌 군체로 변형되었다. 그것은 그렇게 변형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파국적인 변화를 예시한다. 이렇게 퇴행적으로 보이는 모습은, 변화된 환경 속에서 효과적으로 생명을 영위하는 또 다른 방식일지 모른다. 그것은 진화의 개념 속에 포함된 변형이지 퇴화가 아니다. 진보니 퇴화니 하는 것은 어떤 목적론적 개념이 개입된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다. 진화론이 예시하듯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된 자연의 체계를 추동하는 원리는 이성이 아니라, 우연이다. 과학이라는 위험한 도구를 가지고 놀던 어린 아이 같은 인간은 공멸의 위험성을 확대시켰고, 맹목적 우연이 인류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을 더욱 높여갔다. 인간과 기계는 자연선택과 생존경쟁에 추동되는 공(共)진화의 여로에 놓여있다. 노진아의 작품에서 과학기술을 앞장세운 진보는 파국적인 결말을 맺는 듯하다. 인간은 기계를 통해서만 관찰될 수 있으며,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출전| 퍼블릭 아트 2008.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