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 미술과 담론, 정용도 “비인격적 타자의 시선과 부작용의 미학”
2005,11 미술과 담론, 정용도 “비인격적 타자의 시선과 부작용의 미학”

2005,11 미술과 담론

비인격적 타자의 시선과 부작용의 미학

정용도(미술평론)

노진아의 작품과 관련되어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은 개체의 자기증식과 같은 과학적 관점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 특히 존재의 변화에 대해 예민하게 생각하고 반응하는 예술가의 시각일 것이다. 서울대 황우석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로 인해 암이나 알츠하이머 같은 난치병 치유의 희망과 생명윤리의 문제가 갈등상황을 일으키고 있고, 한국 캐톨릭 계의 대표격인 김수환 추기경은 “인간 생명과도 같은 배아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줄기세포 연구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줄기세포 연구가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과 더불어 염려를 일으키는 것은 생명의 탄생과 관련된 개체발생의 과정을 재현해 난치병에 필요한 재료들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논란의 소지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질병치료에 직접 사용된 적은 없기 때문에 무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줄기세포 연구의 과정과 목적은 체세포의 핵을 인간의 초기 난자인 배아에 이식해 질병 치료에 필요한 세포들을 생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질병의 특성에 따른 선별적인 생장 방법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연구과제이다. 장황하게 줄기세포 연구와 그에 수반되는 사회적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노진아의 작품이 지향하는 생명성의 문제가 기계와 인간, 인간과 기계가 소통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소통은 단지 정보의 교환만이 아니라 정보의 교환을 통해 서로 닮아가는 기계와 인간의 존재론적 상황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설치작품 중 를 보면 조그만 아기 인형들이 수백개 바닥에 쌓여있고 관객이 다가가면 센서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떤 특별한 방향을 가지고 움직인다기 보다는 그냥 움직인다. 노진아는 이 인형들을 통해 개체의 자기증식에 관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배아와 체세포 핵의 결합을 표상하는 기표가 되는 것이다. 이런 기표들이 지향하는 바는 개체증식의 두려움에 대한 작가의 감성적 반응의 표현과 관련된다. 하지만 줄기세포 연구에서 아직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는 것은 “유도분화”를 통해 인간 질병의 치료에 필요한 치유제를 얻는 것이지, SF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난자와 체세포 핵을 결합시켜 제2의 복제양 둘리와 같은 복제인간을 만들어내 인간의 편의를 증진시키기 위한 로봇과 같은 ‘노예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진아는 생물학적 복제에 대한 자신의 개념적 구성을 세포와 세포핵을 의미하는 아기인형들, 그보다 좀 더 진화된 형태로 성장한 커다란 성인 크기의 사이보그, 다큐멘터리 등의 형식으로 형상화 시킨다. 이런 방식은 인간이 존재에 대한 문제를 성찰적으로 다룰 때, 즉 인간의 몸과 정신을 사회화 시키는 과정 혹은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노진아가 바라보는 시각은 객관적일 수는 있어도 엄밀히 말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인 비현실이다. 그런데 인간이 비현실에 몰입하는 것은 현실의 억압적인 상황들이 자신의 객관적 존재성을 용인하지 않는 경우 발생하기 쉬운 병리적인 특징이다. 여기서 우리는 노진아의 작품에서 객관적이지만 비현실적인 상황을 존재의 억압으로 볼 수 있을까? 기술적 진보가 가져올 수 있는 인간의 재앙과 비슷한 것에 작가적인 직관을 통해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냉정한 시각에서 인형과 사이보그라는 기표를 성찰해 인간의 유기체적인 특성이 기계에 이식되면서 발생할 수 있는 기의적인 상황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인가? 여기서 노진아의 작품의 종합적인 특성들을 살펴볼 때 인간의 정서적인 면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인형들의 말이 개체의 자기증식이라는 차원에 방향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2번째와 3번째 질문에 관련된 의미들의 생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진아의 작품 <나는 오믈렛이다!!, 2005>에서 인형은 인간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한다. 인간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인간화 되어 가는 사이보그의 정체성은 아직 존재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존재는 인간의 인식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주변에 놓여진 LCD 모니터들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로의 지향은 꿈과 같이 허무하지만 관객들은 이 작품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는 지금 현재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기계가 첨단의 SW 기술들을 통해 새롭게 재탄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재탄생이 가능한 것은 인성을 부여하는 기술에 대한 지향, 즉 줄기세포로 대변되는 사회의 경향과 그것을 종합적으로 완성하는 인공지능(AI) 기술에 대한 기대 같은 것들로 대변될 것이다. 여기서 의미보다는 표현이 중요해진다. 기술적인 표현이든, 예술적인 표현이든 인간의 문화가 지향하는 과학 혹은 기술의 인간화 과정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껏 지녀온 정신의 세계라든지 아니면 정신을 대변하는 문화적 상황에 대한 고찰 같은 것들은 규정할 수 없는 의문의 세계로 환원되어 버린다.
노진아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이보그들이 인간(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은 기술적으로는 아주 단순하다. 관객이 작품 앞에 다가서면 관객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가 작동하면서 미리 입력되어 있는 소리들이 나오고 눈동자는 관객의 동선에 놓여있는 센서의 감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노진아 작품들은 기술적으로 단순하다. 하지만 관객이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눈을 닮은 사이보그의 눈 때문일 것이다. 관객의 움직임을 좆아 가는 눈<갤러리 가이드, 2004> 은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한다. 인간의 얼굴에서 긍정과 부정적인 반응을 넘어 미묘한 정신의 상황을 표현하는 가장 풍부한 표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눈이다. 미술사에서 보면 피카소의 작품에서도 눈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카소는 눈을 통해 지배자의 권력이나 감시의 의미를 표현하기도 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1503~5>는 미묘한 눈의 시선과 표정으로 인해 신비함을 간직한 미소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관객은 노진아 작품에서 눈이 만들어내는 표정을 통해 섬짓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눈이 가지고 있는 표현력에서 기인하는데, 그 눈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것은 사이보그의 미래에 대한 인간의 집단의식 혹은 집단무의식적인 반응과 관련된다. 그리고 그런 반응의 정체는 아직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두려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선 인간의 존재성을 표현하는 도구들에 관해 이야기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있음은 우선 움직임을 통해 알 수 있고, 인간 생명의 유지와 관련되는 활동은 세포분열을 통해 지속되고, 생명유지의 역할을 다한 결과물들은 땀이나 각질화 되어 몸 외부로 배출된다. 세포의 분열활동은 생명을 유지시키지만 그러나 눈은 사물을 관찰하여 뇌에 정보를 공급하고 사고력을 통해 사물에 대한 형태와 기타 정보들을 분석하게 하는 역할을 하여 인간의 지능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노진아의 작품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활동인 생명을 다한 세포의 배출과 같은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과 관련된 의미의 생산이 가능한 감각기관의 움직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지각활동의 의미 생산력과 관련이 있다. 단순히 감각적인 반응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하등동물들에게도 나타나는 자연스런 생명유지의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면서 공간 지배력을 확장해 왔듯이, 감각기관의 효과적인 활용을 통해 의미를 구조화 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역사를 창조해 온 것이다. 노진아의 작품은 이런 진화(혹은 지적이고 감각적인) 능력의 확대와 관련된다. 그녀가 만들어내고 있는 사이보그 인형들은 아직 그 자체로 의미의 창조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관객과의 관계를 통해 그 존재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의미의 확장이라든지 예술적 속성의 발견 같은 것들과는 거리가 있지만 미디어아트라는 분야가 지향하는 인간과의 적극적인 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진아의 물질에 대한 집착 혹은 존재에 대한 감각적 의미부여의 활동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화되어 일정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 감각(sense)은 여타 동물들의 감각과는 다른 감성(sentiment)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감성은 예술 활동을 통해 승화되는 형태를 갖추고 있고, 그런 승화된 형태들은 구조를 통해 하나의 형식으로 완성된다. 그런데 감성이 지향하는 것은 미학적 연구들이 과제로 삼아왔던 모든 예술적인 활동들을 포괄하는 특성을 지닌다. 노진아는 자신의 작업에서 이런 과정들을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으로 확대시킨다. 즉 물질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마치 고품위의 디지털 기술을 통해 구현될 수 있는 상호작용성의 기제들에 대한 인간적 반응의 미묘성과 감성적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녀가 만들어낸 존재들인 사이보그 인형들의 현실적인 가상행위들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상황들이 우리에게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외상(trauma)과 관련된 어떤 심리적 반응들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그런 심리적 반응들을 불러일으키는 과정들은 그녀만의 톤으로 구성된 예술작품에 대한 혹은 문화에 대한 미래적인 비전의 구조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녀가 제시하는 기억과 관련된 상황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미래에 대한 희미한 그림을 강요한다. 그런데 그런 그림들은 전혀 편하지 않다 – 이로 인해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들의 집단의식과 무의식은 무언가 불안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노진아의 사이보그들을 보면서 인간의 미래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이자 작가의 작품을 통해 즉물적으로 제시되는 미래에 부여한 작가의 상상력에 기계적 진화의 부정적 특성을 연결시켜 바라보는 시각일 수 있는 것이다.
노진아에게 개체증식은 진화를 수반하지 않는 일종의 감성적인 덩어리의 반복이자 확장이다. 그러나 인간은 진화를 통해 기능이 분화됨으로써 세부적인 감각 기능을 획득해 왔다. 그리고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1차적인 감각의 기능들이 지적인 활동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즉 감각의 복합적인 활동이 지적인 역량을 강화시키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공감각적 기능의 미묘함이라는 것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하기도 한데, 사이보그의 일방향적인 기술적 진화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결된다. 20세기 중반이후 모더니즘은 예술작품을 더 이상 미적인 범주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즉 미국의 미술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에 따르면 근대 이후의 미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존재에 관한 언명(statement)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예술이 존재의 문제로 변화하게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철학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매체의 특성에 대한 몰입으로 인해 가능해 지게 되는 것이다. 즉 그린버그는 모더니즘 회화의 특징이 되는 평면성(매체 자체의 물질적인 특성)을 통해 예술작품의 존재성의 문제를 이끌어낸다. 즉 매체의 본질적인 특성이 예술작품의 미학적인 속성을 넘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철학적인 존재성에 관한 문제로 변이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의 자체분열과 개체증식을 가능하게 한다. 즉 추상적인 공간이 개입하게 되고 예술작품 역시 끝없이 확장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노진아의 개체증식과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과 21세기 뉴미디어 시대 예술작품들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간에서 예술작품은 확장된 공간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즉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처럼 의미와 관계없이 하나의 분열적이고 파편적인 개체로 존재한다. 뉴미디어 시대의 디지털 기술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나타나는 일상 공간의 평행적인 확장을 넘어 인터넷을 통한 부유와 유목적인 정신 상태로 분열된다. 결국 인간의 정신은 긍정적인 면에서는 인터넷을 부유하는 정보 혹은 인터넷의 스파이더 웹에 존재하는 정보가 되고 부정적인 면에서는 바이러스가 된다. 노진아의 작품은 부정과 긍정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즉 예술작품에서 기술적으로 혹은 뉴미디어적으로 상호작용성의 인간적 가능성, 즉 기계에 인간 정신의 반응과 개입이라는 심리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의미의 무의미화, 우리 인간이 예측하기 힘들지만 기술의 발전 혹은 디지털적인 진화가 어떤 막연한 불안감, 말하자면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당한 것처럼 기계나 인공지능 같은 비인격적인 타자에 의해 인간이 문명세계로부터 쫓겨나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같은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예술의 목적은 무엇이고, 현대미술의 본질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디지털을 새로운 희망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계에 지배당하는 정신의 표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노진아의 작품은 사이보그들을 통해 혹시 우리 인간이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속에서 부유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게 만든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노진아는 기술이 철학자들이 꿈꾸어온 인간의 행복을 만들어주는 유용한 도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의 범주인 기계적 부작용의 세계를 은근히 우리의 삶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