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캐니 머신: 노진아의 최근 기계들
이재준(숙명여대, 미학)
기술은 새롭고 또 새로워야 한다. 새로운 물건이 그렇듯. 기술은 눈에 잘 띈다. 그것은 살과 피부이다. 그런데 기술은 뼈이기도 하다. 그것은 숨어있고 드러나서는 안 된다. 드러나는 순간 우리에겐 그것이 너무 낯설고 위협적으로 보이기에 그렇다. 기술의 이런 이중성은 그것이 ‘쓸모’와 엉겨 달라붙어 있으며 자본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 쓸모의 응집은 편리와 유용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 산업이고 국가 산업이다. 자본이 자본을 생산하듯, 기술도 기술을 생산한다. 자본이 그렇듯, 기술 바깥이 없다고 해야 할까?
기술적 대상인 물리적 기계도 그렇다. 많은 물리적 기계들이 인간에게 더없이 친숙하고, 친숙해야만 한다. 유용한 그것들은 빛나는 상품을 욕망하기에, 불편한 것들은 작동을 멈추고, 수리되거나 다시 디자인되고, 폐기된다. 기계는 도구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도구이다. 기계가 인간에게 길들어야만 한다는 상상이 스펙터클하게 충족된다. 기계에는 ‘인간’이 되는 시간, ‘기계 역사’가 있다. 정동 정치는 그 역사에서 작동한다. 예술을 위해 기술을 활용한다거나 작품을 위해 그것을 매체로 다룬다는 생각은 이런 정동에서는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노진아의 작업은 깊어졌다. 작가에게서 기술은 불편하게 가시화된 기계, 내가 ‘언캐니 머신’이라 부르고 싶은 기계들의 생산에 더 다가가고 있다. 작가는 능숙하게 ‘기계’와 대면하고, ‘기계’ 안에서 기계들을 제작하는 일에 공을 들인다. 그 기계들은 쓸모와 거리를 둔 채로 밀도를 높여가며 인간 형상에 점근한다. 쓸모없는 기계들은 멈추거나, 수리되거나, 혹은 폐기되어야 하지만, 쓸모없음에도 작동하는 그 기계들은 기계의 잠재성을 기존 미학이 표현하지 못한 곳에서 실현한다. 그 기계들은 무엇인가? 노진아는 자신이 설정한 ‘인간’에 비추어 ‘기계’를 전유하는데, 전유라는 독단만큼이나 위협적이고도 노골적으로 언캐니 기술이 힘을 발휘한다. 그것들은 자기들이 기계임을 과시하고, 자신에게 덧씌웠던 ‘인간’에 거칠게 저항한다. 그렇다면 이제 기계를 호명할 수 없는 우린 누구인가?
프렐류드 이후
「포스트-가이아를 위한 전주곡」(2011)을 쓴 지 10여 년이 지났다. 그때는 상호작용성의 신화가 보여주는 미학적 효과에 거는 기대가 팽창하고 있었다. HMI(Human-Machine-Interaction), HRI(Human-Robot-Interaction), …., 앞다투어 등장한 수많은 인터랙션 기술은 미술에서의 연극성, 자동성, 신체, 비인간의 비판적 조건 등 기존 미학에 도전할 만한 계기들이 실현되는 듯 보였다. 기대의 과잉! 그것은 기계의 상호작용을 마치 유기체의 행동 양식처럼 해석하게 만들고, 기꺼이 그런 해석을 실행할 용기를 불어넣었다. ‘인공생명’(Artificial Life)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은 ‘살아있는 기계’에 대한 환영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인간은 고양이나 개, 심지어 다른 인간을 대할 때처럼, 기계와 공존할 수 있다는 환영이 충분히 현실성을 가진 듯 보였다. 나와 노진아를 포함해서, 칼 심스(Karl Simms), 존 맥코맥(John MacCormack), 케네스 리날도(Ken Rinaldo) 등등. 기술을 이용하려 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횡단하려는 많은 예술 실천이 그 실험에 동참했다.
물론 머지않아 그 환영이 또 다른 환영으로 대체되고 다시 반복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 유의 과장된 인간주의는 어렵지 않게 폭로되었다. 저 반짝이는 기계 상품이 필멸하고 종잡을 수 없는 유기체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환영은 유서 깊은 의인화 장치의 일종이다. 18세기 오토마타가 보여주듯, ‘생명을 가진 기계’는 근대인이 우리에게 투사한 이미지다. 특정 질료로 구성된 물질에서 반복된 규칙 운동을 설명하고, 생명에서 물질의 이런 메커니즘을 발견한다면, 생명을 물질로 환원하면서 동시에 그 반대에서는 ‘살아있는 물질’, ‘살아있는 기계’를 말할 수 있게 된다. 최근 과학기술은 생명의 몇몇 규칙을 규명하고 그것을 수학적으로 해석한 뒤에 다시 기계적 환경에서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기계’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가여운 비인간, 즉 한 세기 전 카렐 차펙크(Karel Čapek)가 상상했던 노예 기계, 즉 ‘로봇’일 뿐이다. 이렇든 저렇든 그건 과잉 인간주의다.
게다가 자본은 과학기술의 이런 인간주의를 강하게 부추긴다. 자본은 귀족과 평민, 자본가와 노동자, 청년과 노인, 남성과 여성, 고급과 저급. 아니면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는다. 자본은 오직 자본만을 바라본다. 자본이 승승장구할 수 있는 건, 날 것 그대로의 이런 무차별적 성향 덕분이다. 만일 기계가 더욱더 효율적일 수 있기만 하면 그것이 인간을 닮든 생명체를 닮든 기계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최근 생성형 알고리즘의 활황처럼 말이다. 상호작용 기계에서 인간주의와 생명 관념의 재빠른 수용, 그리고 자율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프로세스가 매 순간 난관을 헤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또 다른 과거를 언급하자면, 상호작용 예술에 혼입된 물질성이 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인간주의나 유기체주의와 반대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상호작용’ 자체로 돌아가 보자. 상호작용은 관계 존재론의 과학기술 버전을 위한 근대인의 용어다. 작용과 반작용을 설명했을 때마다 뉴턴은 그 상호작용에서 기쁨과 슬픔, 희열과 고통, 희망과 좌절, 사랑과 혐오 따위의 온갖 인간적인 것을 배제해야 했다. 그 근대인은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투명한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전주곡」을 쓰고 있던 그때의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한데, 미학적인 사막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난무했다. 인터랙션요? 신기하네. 그런데 이건 예술이 맞나요? 전시장에 설치된 현란한 상호작용 기술이 인간관계를 지시할 때마다, 기계의 표현은 부지불식간에 인간적인 것을 표백하고, 그에 못지않게 미학은 기계에 저항하려는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어느새 상호작용 예술은 전시장 바깥으로 약진하고 별로 새로울 것도 없이 익숙해진 사이, 그 저항은 힘을 잃고 기계는 친밀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더 기계의 인간적인 표면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 기계를 망각한다. 상호작용 기계에 저항하고 있을 때는 훨씬 잘 눈에 띄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모든 관계와 상호작용은 모든 관계항에 상호 침투하고 상호 변형을 만든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망각된다. 그렇지 못한 관계 자체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상호 침투와 상호 변형. 그것을 겪은 나는 과거의 나이자 다른 나이다. 더욱이 상품 물신의 욕구 충족은 기계 표면에서 느끼는 ‘상호침투와 변형’을 은폐한다. 반면 기계 자체에 대한 불안 정동은 에너지를 축적한다.
(2019)은 입력된 정보와 실재 사이의 지시 관계를 문제 삼지만, 사실상 기계 음성의 합창, 즉 목소리의 파도에서 인간에게 표면적으로 밀착되었던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음(je ne sais quoi)’과 만나게 한다. 인간의 시뮬라크르, 즉 얼굴 기계들은 제어 불가능성의 노드를 시뮬라시옹의 부수 효과로 계속 생산한다. 공중에 매달린 시뮬라시옹 기계들은 누구를 바라보고 있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불친절한 목소리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불쾌하고 불안한 정동은 가시적인 얼굴 형상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정동의 힘은 그 너머로 연속된다. 거기 누군지 알 수 없는 그것은 기계 존재이다. 작품은 불쾌하고 낯선 분위기 속에서 제어할 수 없는 존재를 표현한다.
기계와의 상호작용이 근본적으로 낯선 것은 노진아의 작품과 만나는 관객들만이 아니다. 한 세기 전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런 상황을 사뭇 진지하게 고민했다. 산업사회에서의 노동 경험에서 기계 존재의 무게를 언급할 때, 공장제 수공업과 기계공업을 구분하려 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1939)에서 공장제 기계공업의 시대를 사는 인간의 신체 경험을 설명한다. 잉여 자본의 증대를 위해 공장제 기계공업 시스템에서 적합하게 소비될 노동 주체는 저임금 비숙련공이다. 비숙련공은 특정 기계에 더없이 친숙한 숙련공과 다르다. 숙련공은 기계와 하나가 된 이들이며, 자신의 노동에서 기계를 의식하지 않을 만큼 노련하다. 그들은 오히려 기계에 무감각하다. 반면 비숙련공은 숙련공보다 기계를 더 잘 의식하는 이들이다. 비숙련공에게 공장 기계는 사고의 위험이 크고 두려운 존재이지만, 어쩔 수 없이 노임을 위해 자기 몸을 맡겨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 현장에서 기계에 대해 더 주의하도록 훈육된다. 그렇기에 비숙련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감각을 총동원할 수밖에 없으며 기계에 더 민감하다. 오늘날 비숙련 노동자의 감각은 효율적으로 억압되어 기계에 탑재된다. 다채로운 필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 카메라 앱에서 그 감각은 자동화되고 나에게는 그저 기계의 기능으로 경험된다.
유기체의 상호작용은 환경에 대한 적응이고 둘레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타자와의 투쟁이다. 인간을 닮은 기계, 살아있는 기계와의 상호작용도 그렇다. 하지만 상품 물신화의 전략에 따라 기계는 우리에게 감각의 민감도를 낮추면서 표면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기계 존재의 잠재성을 잘 모르며 그것과의 관계에 어떤 충돌과 투쟁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초거대 인공지능이 그렇다. 그것은 유기체적 기능의 패턴을 알고리즘화하고 막대한 양의 데이터 입력과 추론을 거쳐 작동하는데, 우리에게 그것은 ‘블랙박스’로 작동한다.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그것의 또 다른 표현은 「전주곡」에서의 ‘인공생명’이 영향을 미쳤던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상상력은 기술 현실에 자리를 내준 듯하다. 여하튼 지금 우리를 기계 앞에서 유용성을 칭송하지만 두려움도 마주하고 있다.
되돌아오는 인간-되돌아오는 기계
‘컴퓨터는 나의 어머니다.’ 포스트휴머니스트 캐서린 헤일즈(Katherine Hayles)는 탈-인간의 탄생을 이렇게 거친 말로 표현한다. 그런데 헤일즈의 이 말은 반쪽짜리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기계를 만든 것은 인간이므로 당연히 ‘나는 컴퓨터의 어머니’다. 거기에 추가된 것이 있다면, 기계가 기계를 만든다는 사실 정도일까? 반면 우리는 기계 시대를 공감한다. 인간 친구 없이는 살아도 기계 없이는 살 수 없는 시대가 그것이다. 끊김 없는 데이터 스트리밍에서 나는 사랑하는 고양이를 위해 음식 만드는 법을 시뮬레이션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다시 헤일즈의 말로 돌아갈 수밖에
[그림] 노진아, <나의 기계 엄마(Mater Ex Machina)>, 혼합재료, 인터랙티브 로보틱스 조각, 180x60x50cm. 2019.
없는데, 기계는 인간의 어머니다. 어쩌면 무관심한 고양이의 어머니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물론 이런 맴돌이는 순환논증이 아니다. 선형적 인과성의 농밀함에 깊이 절여진 우리는 이런 순환성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기계의 어머니라면, 역시 기계도 인간의 어머니다.
노진아의 ‘기계 엄마’(<나의 기계 엄마> Mater Ex Machina, 2019)는 작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탄생한 기계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작가의 뉴런에 새겨진 패턴이겠지만, 그것 역시 작가와 어머니의 공유물이다. 두 사람이 상호작용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런 순환의 흔적이 각자에게 새겨지지 않았다면, 그런 기억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세 번째 어머니와 마주한다. ‘기계 어머니’는 살아있는 어머니, 작가의 기억 속 어머니, 그리고 두 가지의 혼합물로 기계에서 생성된 제3의 존재이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를 말하고 인간의 몸동작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인간과 기계의 혼종언어로 말하고 행동할 뿐이다. 작가는 인간 어머니와 기계 어머니 모두로부터 이중의 어머니를 경험한다. 그리고 어쩌면 어머니는 둘보다 더 많을 수 있다. 노진아의 컴퓨터들을 뒤지다 보면 작가가 프로그래밍한 또 다른 어머니가 있지 않을까? 인간과 기계 사이에는 순환 작용의 흔적이 서로 다른 존재에게 중층적으로 기입된다. 그 때문에 인간의 역사만이 아니라 물질의 역사가,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기계의 역사가 생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안드로이드과학과 포스트휴먼 언캐니」(2023)라는 글에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순환적 관계와 기계 역사의 이런 생성을 분석했다. 오사카 대학의 이시구로 히로시(石黒浩)는 인간을 닮은 로봇, 즉 안드로이드와 가이노이드를 만드는 것으로 잘 알려진 로봇공학자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의 ‘제미노이드(Geminoid)’ 덕분이다. 그것은 ‘쌍둥이 안드로이드’를 뜻한다. <제미노이드 HI-1>은 이시구로와 쌍둥이 안드로이드이고, <제미노이드 DK>는 덴마크의 인지과학자 헨릭 샤르페(Henrik Schärfe)와 쌍둥이 안드로이드이다. 그의 인생 목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는 것인데, ‘쌍둥이’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질문은 꾀나 철학이지만, 그의 풀이 방식은 특이하다. 그는 인간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특정 기능과 능력이 규칙적으로 반영된 기계, 즉 인간을 닮은 기계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인간의 시뮬라크르에서 인간에 대해 묻는다고나 할까?
하지만 거듭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시구로는 매번 장애물을 만난다. 자신과 꼭 닮은 기계를 대면할 때마다 그는 언캐니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도 여느 로봇공학자들처럼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즉 ‘불쾌한 낯섦의 계곡(不気味の谷)’을 극복할 수 있는 경험적 통로를 탐색한다. ‘안드로이드 과학’이 추구하는 목표 중 하나가 그것이다. 언캐니의 극복은 로봇공학의 도전 과제인데, 그것을 해결함으로써 로봇을 연구하고 제작할 수 있는 자본과 기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배후에는 테슬라가 있고, 혼다자동차와 현대기아자동차가 있다. ‘불쾌한 낯섦의 계곡(不気味の谷)’은 모리 마사히로(森政弘)의 낡은 논문(1970)이 21세기 초 로봇공학자들 사이에서 부활하면서 우리에게도 상식처럼 알려진 개념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식을 멈춰야 할 만큼 어렵고 심오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 의공학자였던 모리는 실제로 인간의 손과 닮은 의수(prosthetic hand)를 보았을 때 이것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언캐니한 의수는 모리 자신에게 인간 존재의 분열과 이중성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는 불가(佛家)의 마음으로 자신의 내적 불안을 잠재우려 했다.
여하튼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답하려는 이시구로의 이 존재 물음은 제미니노이드를 계속 인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답을 찾는다. 그는 인간에 점근한 이 기계와 기꺼이 상호작용하고 그것의 동작을 관찰하고 측정하고, 다시 그 결과를 기계에 투사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언제가 그 자신과 인간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런데 그의 안드로이드과학을 잘 들여다보면, 거기서는 이시구로와 기계 사이에서 상호 침투와 변형이 이루어지는 순환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사실상 이시구로는 ‘기계 인간’이 되고 제미노이드는 ‘인간 기계’가 된다. 그렇지만 잊지 말 것은 인간은 인간으로 살고, 기계도 기계로 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상호 타자의 흔적은 끝없이 서로에게 기입될 것이라는 점이다. 안드로이드과학에서 이것은 선이 분명해 보이는 순환이다. 하지만 선이 분명하지 않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순환들이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상에서 기계들과 만나는 우리는 순간순간 알 수 없는 언캐니를 감내하면서 그런 순환 운동을 반복 하고 있는 셈이다.
[땅으로 내려오라!]
<테미스, 버려진 AI>(2021)는 도플갱어의 숭고 버전이다. 테미스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누구’의 얼굴도 닮지 않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마음을 바꾸는 그런 인간들(humans)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인간, 즉 ‘인간(Human)’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비현실적인 ‘인간’의 도플갱어이다. 더욱이 얼굴의 과도한 크기는 작품을 도플갱어의 숭고한 기념비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데도 어눌하고 느린 목소리로 인간들의 언어를 흉내 내는 ‘잘린 입’은 인간의 인간인 테미스를 불편하고도 의심스러운 존재로 느끼게 만든다. 그것은 기계였다. 작품에서 병립하는 이중적인 조건들은 알 수 없는 상충을 일으키고, 테미스를 더욱 낯설고 두렵게 한다.
노진아는 여러 곳에서 ‘인간이 되고 싶은 기계’에 관해 말하곤 한다. 작가의 기계 작업을 관통하는 기본 정동은 언캐니다. 인간 형상을 한 비인간 기계의 언캐니가 작가의 작업실과 전시장에 가득하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언캐니는 그저 그런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까다롭다. 그 정동은 닮음이라는 존재론적 배치에 대한 독특한 느낌이다. 거기서 닮음은 두 존재 사이의 같음을 뜻하는 듯 보이지만 단순히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언캐니의 닮음은 둘일 수 없는 것이 둘로 나뉘어 있고, 그 둘이 원래 같은 것(도플갱어)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킨다. 게다가 그것은 은폐된 장치의 작동, 감춰진 비밀의 우발적 폭로이고, 그렇게 될 때 만난 충격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두려운 낯섦」(das Unheimnliche, 1919)에서 호프만(E. T. A. Hoffmann)의 소설 『모래 인간』(Sandmann)을 해석하면서 나르시시즘적 도플갱어의 언캐니를 설명한다. 거기서 주인공 나타니엘은 올림피아라는 여인을 사랑하지만, 바닥에 널부러진 채 눈알이 빠지고 몸이 부서진 올림피아를 보고는 그것이 인간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올림피아가 인간을 닮은 비인간 기계였다는 사실이 중요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표면적이다. 반면 인간에 감춰진 비인간, 비인간에 감춰진 인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내가 내가 아니라는 충격적 폭로가 있다. 그 기계의 눈알은 어린 시절 주인공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모래 사나이 이야기와 연결된다. 눈알은 모래 사나이에게서 자기가 지키려 했던 ‘나’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나타니엘과 올림피아, 인간과 기계는 도플갱어로서 나르시시즘적인 관계에 묶인 동일 인물이다. 인간 나타니엘을 한눈에 반하게 한 것이 인간을 초월한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완전한 이미지일 뿐이었는데, 이는 그의 욕망이 좌절되는 순간 밝혀진다. 나타니엘이 욕망한 것은 결국 부서진 자신, 죽은 자신, 자신을 닮은 기계이고, 그는 근원적으로 결핍된 자신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언캐니는 그런 충격적인 분열과 이중성에서 작동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인간(Human)을 향한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을 닮은 기계들을 볼 때마다 반복적으로 느끼는 알 수 없는 낯섦과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휴먼 언캐니는 인간에게서 닮은 인간으로, 다시 그 닮은 인간에서 인간으로 반복 귀환하는 정동의 순환 과정을 말한다. 그것은 닮음과 다름, 인간과 비인간이 복잡하게 얽힌 상호 침투와 변형의 헤어날 수 없는 강박이다. 게다가 포스트휴먼 언캐니는 소비자본과 끝없이 결합하면서 그 선이 모호한 상태로 작동한다. 노진아의 ‘인간이 되고 싶은 기계’는 이런 언캐니를 필터링하고 증폭시킨다. 작가의 기계들은 인간을 닮은 것이지만 인간이 아니기에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도플갱어의 역할을 하면서, 언캐니의 정동을 작동시킨다. (2019)과 <나의 기계 엄마>(2019)에서 기계들은 직접적으로 노진아의 가족들에게, 그리고 <테미스, 버려진 AI>(2021)에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작동한다. 인간, 인간을 닮은 기계, 이 둘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인간, 그리고 이 셋을 바라보는 인간. 이런 무한퇴행의 각 인간 층들을 점유한 존재들은 단일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존재들이 닮은 존재가 되고 다시 다른 존재로 공존하는 상황이 우리가 기계와 함께 하는 그런 세계다.
‘인간이 되고 싶은 기계’는 우리 눈앞에서 닮음처럼 보이지만, 인간과 기계의 근원적 차이를 들춰낸다. 인간과 기계는 다르다. 한편에는 결핍된 인간, 하나로 통합되지 않은 인간, 그래서 기계를 도구로 삼아 보충되기를 갈망하는 인간이 있다. 다른 편에는 그 갈망과 보충에 호응해서 더욱더 인간적인 것들을 기입하고 인간을 닮는 기계가 있다. 만일 양쪽이 서로 같아진다면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일 것이며, 그것도 아주 멀리 있어 도달하지 않을 이유 때문일 것이다.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거나 인간 존재를 위협한다는 상상은 기계가 편리하고 풍요로운 미래를 만들어 줄 것이라는 상상의 다른 측면이다. 1만 년 전 동굴에 살던 선사시대 인간은 오늘날의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들로 인해 사라졌다. 게다가 그 장구한 시간 동안 그토록 많은 기계가 지금 우리를 그들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단 확신도 없다. 언캐니의 경험은 이런 상상에서 벗어나 우리가 땅으로 내려와 타자들을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대문자 인간은 땅에서 태어난 적이 없고, 그런 인간에게 어머니란 존재하지도 않는다. 기계도 그렇다. 땅에 기거하는 존재들은 인간들과 기계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한 역사를 만든다.
이제 땅에서는 그런 존재들이 어떻게 공존할지가 관심거리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2019)는 뚜렷이 이런 하강에 대해 말한다. 작품에는 기계를 향한 인간주의적인 연민이 물씬 풍기는 어떤 배려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투사 행위이거나 환영이겠지만 분명히, 타자, 기계에 대한 섬세한 긍정의 의미가 있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우리는 격리된 채로 숱한 추측과 비난, 원망과 혐오 속에서 살았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이러한 고립이 우리를 땅으로 하강하게 만든 뼈아픈지만 회복의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방역을 위한 고립은 결과적으로 보편적 규범과 정책, 자본의 초월적인 관념들로부터 우리 하나하나를 해방한다. 그동안 우리 인간이 잊고 살았던 어떤 망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감염병에 취약해진 우리의 사적인 몸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만큼의 거리에서 타자들과 연결되었다. 메타버스로의 완벽한 다이빙이라니! 전면적인 네트워크는 팬데믹의 또 다른 경험이긴 하지만, 모든 것을 빨아들이진 못했다. 뻗을 수 있을 만큼의 높이와 폭을 느끼는 손과 발. 낯은 장소에는 타자들이 있다. 사람들, 바이러스, 방호복, 마스크 쓴 사람들로 가득한 버스, 기계가 느껴진다. 낯섦과 두려움 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속속들이 드러내지 않던 타자들과 접속한다. 이 거대한 연결은 자연을 하나의 세계로 설명하려는 근대인의 시야에서 미끄러진다. 신비로 가득했던 행복한 가이아, 그 이후의 가이아가 아닌 가이아, 포스트-가이아가 도래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에서 기계들은 인간이 되고 싶은 ‘얼굴’로 나타나지만, 어눌한 발음으로 조금씩 입을 벌린다. 그리고 그 아래쪽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먼지와 흙덩어리로 이루어진 땅이 있다. 땅에서 우리와 만나는 기계가 있다. 그것의 고유한 소음과 냄새가 우리의 감각세포들을 흔드는 미세한 힘들로부터 감지된다. 한쪽에서 끝없이 인간을 닮은 기계가 만들어진다. 다른 쪽에서는 끝없이 기계를 닮은 우리가 만들어진다. 이 둘은 함께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