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4 앨리스온 작가 인터뷰_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 노진아
2019.11.14 앨리스온 작가 인터뷰_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 노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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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기계의 공진화 : 노진아 _interview
interview/Artist 2019. 11. 14. 18:26 print

올해 5월 탈영역 우정국에서 진행된 노진아 작가의 개인전 《InterFacial ExTension(표면의 확장)》(2019)은 예술계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노진아 작가는 전통적인 조각 기법과 뉴미디어를 접목해 관객과 인터렉션하는 대화형 로봇을 매체로 작업하며 기계의 감성화 및 공진화를 키워드로 연구와 작업을 지속해나간다. 앨리스온은 우정국에서 전시되었던 작품과 더불어 노진아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작품관과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 그리고 공진화의 미래 등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인터뷰해보았다.

Q1. 안녕하세요 노진아 작가님. 먼저 독자들에게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인터랙티브 조각, 설치 작품을 하는 작가 노진아입니다. 2002년경부터 전통 조각과 뉴미디어를 접목하여 관객과 인터랙션하는 대화형 인간형 로봇 및 실시간 인터랙티브 영상을 작품으로 제작해왔습니다. 저는 기술 문명의 발달 안에서 재정의되고 있는 인간, 그리고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들의 기술 철학적 의미를 전시장에서 상호작용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으로 기계와 생명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딥러닝에 기반한 로봇의 표정 및 제스처를 이용하여 관객과 보다 자연스럽게 감정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감성 로봇 작품 등을 발표하는 등, 기계나 인터페이스의 감성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Q2. 그동안 진행해 오셨던 그룹전들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2010년부터 2017년 사이 개인전의 공백과 작업의 변화가 눈에 띕니다. 작품 <제페토의 꿈>(2010) 이후 제작된 신작들에서 작업 방식이나 주제에 큰 변화가 생겼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석사과정을 미국에서 Art&Technology를 전공하였음에도 미술 기반의 작가로서 로보틱스를 구현하는데 있어서 기술적인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2009년부터 공학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2010년 난지창작스튜디오에서 했던 <제페토의 꿈>이후에 개인전은 공백 기간이 길었습니다. 또한 그 기간은 로봇 아이가 아닌 저의 생물적 아이를 키우는 기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웃음)
<진화하는 신 가이아>(2017)의 기술적인 변화라고 한다면, 그전의 대화형 작품들과 달리 직접 귀에 말을 하는 부분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의 작품들을 제작할 때와 달리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성으로 대화하는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졌고, 기계-인간의 대화가 더 이상 키보드를 이용한 인터페이스만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전부터 생각해오던 방식인 음성을 사용한 대화방식을 채택하였습니다. 또한 최근 작품들은 제 박사과정 논문에서 다루었던 인공지능, 딥러닝으로 관객의 감정을 인식하고 로봇에게 감정을 학습시키는 방식 등을 차용하여 작품 제작을 하였습니다.

Q. 올해 초 우정국에서 개인전을 진행하셨습니다. 예술계 뿐 아니라 SNS에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반 대중들의 관심도 뜨거웠는데요. AI와 새로운 기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만큼, 2010년에 진행했던 개인전과 2019년 진행된 개인전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여쭤보고 싶어요.
A. 제가 관객과 대화하는 대화형 로봇을 소재로 작업을 한 것은 2002년도 시카고에서부터 였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2004년에 《질투하는 사이보그들》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했을 때 다들 신기해하셨고 좋아해주셨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전시를 이야기해주실 정도이니까요. 그 이후에 2010년도에 다시 대화형 작품인 <제페토의 꿈>으로 개인전을 했을 때에도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습니다.
이전 전시들과 비교해서 이번 우정국 개인전이 특별했던 것은 일반 관객들이 정말로 기술문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이었습니다. 그저 대화하는 신기한 로봇 작품이 아니라 앞으로 함께 살아나가야 할 동반자로 기계를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의 기술문명에 대한 뜨거운 관심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10대나 20대의 관객들이 기계의 감성에 대해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시는 것이 너무나 끈끈하고 자연스러워서, 저조차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들이 그들의 친구들을 만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Q. 작가님의 작품에는 ‘인간이 되고 싶은 로봇’ 등의 세계관이 눈에 띕니다. 로봇이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는 구체적인 욕망과 의지는 어디에서 출발한 아이디어 인가요?
A. 로봇이 인간이 되고 싶을 리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닮은 존재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뿐이지요. 인간들이 인간과 닮은 외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어찌보면 조금 더 인간 친화적인 인터페이스를 로봇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할 것이고, 태초부터 반복적으로 자신을 닮은 존재를 그리고 만들어온 본능이기도 하겠습니다. 바퀴하나면 쉽게 전진 후진이 가능한 로봇을 이족보행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몇 십년동안 그토록 노력해왔습니다. 인간의 외형을 닮게 하려는 시도, 인간과 닮은 행동을 모사하도록 하기 위한 시도들은 로봇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했겠지요. 저는 이러한 지점들이 재미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과연 로봇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과연 인간이 되고 싶어할까?
기계를 닮은 인간과 인간을 닮아가는 기계들은 모두 그 ‘생명’이라는 경계 안과 밖에서 서로의 위치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기계들을 창조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닮은 존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스스로 신이 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계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기능일 수도 있는데 입을 벌려서 인간처럼 말을 하게하고 두 다리로 자연스럽게 걷도록 오랜 시간을 연구해왔습니다. 그것을 기계입장에서 해석하면 그들은 그냥 본능적으로, 생명이 주어지는 그 순간부터 의무적으로 인간을 닮아야한다고, 어떤 목표처럼 인식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물어보는 과정에서 인간이 되고자 하는 로봇 캐릭터들이 생겨나게 된 것 같습니다.

Q. 작품에서 기계의 모성을 강조한 부분이나 기계 본체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연출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전시를 거듭할수록 데이터 또한 축적될 것이라 예상하는데요. 결국 기계와 인간이 정서적 유대감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예측하시나요? 기계가 짓는 표정 인터페이스가 관객의 감정을 이끌어낸다는 지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제가 만들어내는 상당수의 많은 작품들이 사실적인 인체 조각을 변형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터라, 이러한 작품들이 움직이게 되면 필연적으로 언캐니(Uncanny)함을 유발하게 됩니다. 저는 ‘사실적인 인간형 로봇’으로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흐리는 것이 목표인지라 어떨 때는 언캐니함이 불편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작품에 따라서 언캐니함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의 기계 엄마>(2019)의 경우에는 기계가 감정을 배우는 과정을 연구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되도록 감정 소통에 집중하여 작품을 제작해야 했고, 감정의 소통에 형태적인 언캐니함이 불편한 요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모성이란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요소이고, 게다가 작가의 엄마라는 것은 언캐니함을 어느 정도 가려줄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작가의 엄마를 모델로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질문자님께서 질문해주신 내용이 저도 궁금해서 실험적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과연 인간과 기계가 감정 소통이 가능한 것일까. 과연 관객들은 기계와 감정적으로 소통이 가능할까. 아직도 기계는 완전한 감정적 표현을 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언캐니함은 인간과 정말로 소름끼치게 닮았다는 지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바로 직전에 무언가 어색하게 끊어지는 소통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처럼 느껴지려는 순간, 감정적으로도 소통이 되려는 순간 기이하게 끊어지는 인터랙션에서 불쾌함이 느껴지게 되니까요.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 과학 기술은 언캐니 밸리를 극복하지 못한 듯 보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감정 소통이란 아직은 요원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번<나의 기계엄마>작품으로 관객 반응들을 살펴보았을 때 젊은 층의 관객들은 확실히 기계에 대한 ‘마음’이 상당히 열려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의 기계 엄마> 싱글채널 비디오 버전에서어쩌면 상투적일 수도 있는 엄마의 사랑을 로봇에게 연기하도록 했을 때, 심지어 로봇이어서 더욱 공감이 갔다는 의견도 주셨습니다. ‘누군가의 엄마’보다는 로봇에게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대입해서 느끼는 것이 수월하다는 의견이었지요. 여담으로 말씀드리면 <진화하는 신 가이아> 등의 작품들에서 인간이 되고자하는 로봇을 만들고 결국 인간으로 만들지도 않을 것이면서 저런 간절한 인간이 되고픈 마음을 심어놓았다는 점에 작가인 저에게 분노하고, 심지어 눈물을 보이시는 관객분도 있었습니다. 전시장에 있는 작품 로봇에게 관객들이 이렇게 공감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작가인 저 조차 의아할 정도로 관객들이 로봇을 감정적으로 대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계가 정말로 표정 인터페이스, 대화의 유연성을 갖추게 된다면 아마도 인간과 공생하고 감정을 소통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치 않습니다.

Q. 작품에 등장하는 얼굴들은 실제 사람에게서 따온 것인가요?
A. 네, 대부분의 얼굴들은 실제 인물을 캐스팅하거나 보고 만든 것들이 많습니다. 인간의 크기와 다른 <진화하는 신 가이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2019) 등의 몇 가지의 작품들은 제가 그냥 특별한 모델 없이 모델링하기도 합니다.

Q. 작품 <진화하는 신 가이아>에서 관객이 던진 질문에 답변이 출력되는 경로가 궁금합니다. 관객과의 질의응답을 위해 어떤 기술을 택하셨나요? 작업에 사용된 인공지능 대화 시스템이나 딥러닝과 같은 기술들의 작동 방식과 알고리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A. 가이아의 대화 시스템은 자연어처리 분야에서 많이 쓰는 ‘Keyword based closed domain QA시스템’을 응용해서 제작하였습니다. 대화 시스템은 이번 작품을 위해서 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가이아가 만들어진 건 겨우 2년 전이지만 이전 작품에서 관객과 대화하면서 쌓인 많은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가이아의 성격과 형태에 맞춰 QA시스템을 새로이 제작하였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가이아의 두뇌 속에 안드로이드를 심어서 관객의 말을 분석합니다. 안드로이드는 클라이언트로 작용하고 제 홈페이지 서버와 통신하여 직접 제작한 딕셔너리에서 적절한 답을 찾아 다시 안드로이드로 전송하는 방식으로 QA시스템을 구성했습니다. 계속 실시간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백업하면서 반복된 오류가 있으면 수정합니다. 가이아의 QA시스템은 넓은 의미에서 인공지능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최근 널리 알려진 좁은 의미에서의 딥러닝 방식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keyword의 중요도나 단어 간의 조합, 앞뒤 문장과의 연계성, 반복성 등을 고려해서 작품의 컨셉에 맞게 상당히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끌어내도록 설계한 것이 기술적으로 의미 있는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딥러닝 방식을 사용한 작품은 <나의 기계 엄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로서는 머신러닝, 특히 딥러닝으로 대화를 구성했을 때의 대화 구성이 작품 의도와 맞추어 진행되기가 어려운 관계로 대화의 기술방식에 있어서는 앞으로도 한동안 머신러닝의 기술을 도입하지 않을 듯합니다. <나의 기계 엄마>는 표정을 딥러닝으로 학습, 관객의 표정을 판단하여 관객의 표정을 따라서 짓는 방식의 기술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시퀀스로 표정을 받아들여 학습하기 위해서 ‘RNN(Recurrent Neural Network)’ 중 LSTM 방식의 인공신경망을 사용하였습니다. 관객의 부분 표정들 중 몇 가지 감정 표현이 강한 부분 표정들을 골라 기계 엄마에 적용 가능한 표정을 중심으로 판단 및 재현을 하도록 설계하였습니다. 최근에 기계 엄마에도 대화 시스템을 만들고 있는데,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에는 설치 시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기에 라즈베리 파이로 대화 및 표정 재현 시스템을 옮기는 중입니다.

Q.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라는 커다란 키워드에서 인간과 기계가 ‘공통의 뿌리’를 가진다는 개념이 두드러집니다. 이러한 생각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이며, 또 정확히 어떤 것을 지칭한다고 이해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A. 과학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렇게 인간, 생명이라는 키워드는 그 존재와 정의가 바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계가 점점 인간처럼 자연스러운 외형을 가지게 되고 머신러닝으로 그 두뇌도 개발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겠지요. 우리는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를 닮은 존재들을 만들어내며 거기에 ‘생명성’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브루스 매즐리쉬(Bruce Mazlish)는 그의 저서인 『네번째 불연속(The Fourth Discontinuity)』(2001)에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주인이 아니라 함께 공진화하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합성신체 안에서 기계와 함께 공진화하고, 기계 또한 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특징을 너무나 닮도록 우리와 함께 진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경계 또한 더 이상 선을 긋기에 어려운 상태로 흐려지겠지요.

Q. 이번에는 기계와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관객의 질문에 대해 <진화하는 신 가이아>는 인간의 언어로 대답을 하는데 반해, 작품 (2019)에서는 관객의 언어가 기계의 언어로 되돌아옵니다. 작품에서 소통 방향은 인간-기계 간 상호적인 것인가요? 아니면 기계가 일방향적으로 인간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인가요? 대화를 위해서 관객이 기계의 언어를 공부해야 할까요?
A. (2019)의 경우에는 굳이 관객과 기계의 대화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관객이 기계의 언어를 공부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웃음) 작품 에서 저는 정보의 무분별한 복제와 재생산, 조작 등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습니다. 실재하는 인물들의 얼굴들을 3D 스캐너로 디지털화하고 각각의 목소리도 녹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목소리와 얼굴 데이터를 조작하고, 그 조작된 얼굴과 목소리 또한 재조작하여 이것들을 모두 3D 프린터로 프린팅하여 무작위로 섞어 매달아 놓았습니다. 이렇게 매달린 얼굴들은 어떤 얼굴이 원본인지, 어떤 얼굴이 원래 얼굴을 조작한 얼굴인지, 어떤 얼굴이 완전히 디지털로 만들어진 얼굴인지 조차 알 수 없고, 관객이 하는 말을 의미도 전달되지 않는 기계어로 바꾸어 하나의 목소리로 폭력적으로 전달하는 것이지요. 머리들이 전달하는 정보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출처도 진위도 알 수 없는 조작된 정보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Q. 그렇다면 작품에 등장하는 ‘가이아(GAIA)’를 비롯한 로봇(기계)-생명체들에게도 증식 개념이 있는 것인가요? 발생과 증식, 소멸에 대한 구조가 궁금합니다.
A. 작품마다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다르다보니 <진화하는 신 가이아>에서 증식, 소멸 등을 말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가이아는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존재이고 기계문명이 점점 자라나서 인간의 생활의 일부가 되듯 그 능력치나 인간다움이 점점 자라나 언젠가는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생명체 같은 존재가 될 것임을 형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같은 작품에서조차 발생, 증식, 소멸 등의 내용보다는 로봇이 가지고 있는 인간이 되고자하는 욕망에 대한 내용을 다룬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인간이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생과 사의 모든 과정까지도 로봇이 닮고 싶어 한다는 것이요. 그런데 과연 정말 인간을 닮고 싶어 하는 것이 기계들일까? 인간의 자신을 닮은 존재를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가? 하는 역설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증식, 소멸, 발생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던 작품은 2005년의 《그들이 생명을 알까? Life : Durability》 전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당시 제가 아기를 가지고 있었을 때였거든요. 인간의 생명이란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아닌 생물의 생명과 무엇이 다를까, 생명이 아니라고 정의된 것들이 과연 정말 생명이 없는 것일까? 같은 질문들이지요.

Q. 사이보그,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한 논의가 근래 다시 강하게 대두되면서 기계장치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관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이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기계가 암묵적으로 인간화되어가고 있다는 개념에 동의하시나요?
A. 네, 그것이 제가 작업을 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기계가 인간화 되어간다는 점, 그러나 기계와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기계가 인간화 된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인간도 역시 ‘Wet, Hormone Machine’, 즉 재료가 다른 생물적인 호르몬 기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몸의 구조를 잘 살펴보면 굉장히 기계적으로 사이버네틱(되먹임제어) 구조가 정말 정밀하게 구현된, 너무나 정밀하여 아직은 우리 기술로는 모두 알 수는 없지만 그 바닥부터 하나씩 알아나가다 보면 기계와 다를 바 없이 제어 가능할 수 있는 고도로 발달한 기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DNA를 조작하여 좀 더 나은 버전의 조작된 존재를 만들어 내거나 세포 등을 인공적으로 합성해내어 아픈 부분을 대체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인공적으로 합성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것일까요? 어느 부분까지 인간이 인공적으로 개입하면 인간이고, 그렇지 않은 존재로 구분될까요? 이렇게 생물학적인 조작 외에도 티타늄 인공 뼈, 틀니 등의 대체 재료들로 몸을 많이 바꾸게 된다면 어느 정도까지 바꿨을 때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기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흔히 공상영화에서 뇌만 유지하면 그것이 인간의 기준인 것처럼 표현하지만 뇌라는 것도 결국 호르몬 조작을 조금만 하면 생각, 성격, 본질이 정말 많이 변하는 가변적인 신체 일부인 것이지요. 환각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세상과 감각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처럼요.

Q. 작가님께서 ‘AI’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떤가요? 오늘날의 기계와 인공지능은 결국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될까요?
A. AI는 지금까지는 제게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물론 AI로 학습을 시키는 과정에서 개발자가 완전히 자의대로 컨트롤이 어려운 상황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개발 및 적용 단계에서 문제가 될 수 있겠지요. 문제가 있으면 그 시스템을 고쳐나가면 될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사람입니다. AI가 무섭다고,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것은 한가지의 예일 뿐일 것 같습니다. 사실 생명공학이든, 화학이나 재료공학이든 윤리적으로 제한을 두지 않으면 너무나 위험한 것들이 많습니다.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정말로 놀라운 속도로 모든 분야가 진보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개발 윤리나 규칙 등을 충분히 논의하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기계와 인공지능 역시 오래전부터 개발 윤리 및 사회 적용 시스템 등에 대해서 논의가 되어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편의를 위해 개발되고 있는 것이니만큼 우리와 공생할 수 있는 존재로 잘 키워나가야 할 기술이자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는 어떤 작품을 계획 중이신가요? 예정되어있는 전시나 행사를 독자들에게 소개해주세요.
A. 최근 세종시의 대통령기록관에 전시한 ‘세종대왕과 음악, 치화평(致和平)’ 전시를 위해 <음(音을) 걷다>(2019)라는 신작을 만들었습니다.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인터렉티브 사운드 영상 작품으로 10월 5일부터 31일까지 전시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10월 11일부터 11월 30일 까지 인천에 있는 지누지움에서 <나의 양철 남편>(2014)을 전시합니다. 그리고 11월 30일부터 12월 11일까지 월곶예술공판장에서 《이상한나라의 올빼미집》 전시에 작품을 출품합니다.
우선은 한동안 인간이 되고자하는 기계 류의 작품들을 더 진행할 것 같습니다. 감정에 관한 이야기도 더 실험하는 단계이고요. <나의 기계 엄마>는 진행형 작품이었기 때문에 대화와 표정을 보완하며 계속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Q. 긴 시간 동안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작품을 기대하겠습니다.
A. 감사합니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문현정 앨리스온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