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아의 미생물未生物
이수영 (백남준 아트센터 연구원)
어렸을 때 우연히 잡은 벌레를 들여다보다가, 가느다란 다리에 촘촘히 붙은 솜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빠져 들어간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과학시간에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식물 표피는 어떠했던가. 매끈한 것만 같았던 그 곳에 그렇게 미세한 여러 동그라미-세포들이 자리잡고 광경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신기하기만 했다. 예술과 과학,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잡지 레오나르도Leonardo의 40주년 기념호에도 나노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다루는 특집 기사가 실렸다. 1-100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범위에 있는 원자나 분자를 연구하는 기술이 발달하여 과학자들은 물론 예술가들에게도 나노 스케일의 현상이나 물질들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노진아의 미생물 시리즈도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세균 배양용 접시에 담긴 어느 무기물의 표면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과정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관객들이 이를 x 10000000배의 비율로 들여다보자 마치 피 속의 적혈구같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를 다시 X1000000000000000000배의 배율로 들여다본 결과, 이들은 마치 생물과도 같은 표정으로 움직이며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다. 이들은 작가의 명령이나 프로그램에 의해 조작되고 움직이는 일종의 기계로 보인다. 그러나 이 존재를 규명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이들에게 미생물未生物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작은 생물을 뜻하는 미생물微生物이 아니라, 생물이 아닌 혹은 아직 생물이 되지 못한 존재라는 뜻이다. 우연찮게 높은 배율로 현미경을 들여다보다 발견한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다. 표정도, 움직임도, 혹은 그 울부짖는 듯한 쉰 목소리도. 무기물의 표면에서 발견된 이 존재에게 생물인가 생물이 아닌가하는 일차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생물live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는 일차적으로 성장하고 번식할 수 있는 능력, 때때로 개체간의 소통능력이나 환경에 대한 적응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과연 성장하고 번식하고 소통할 수 있을까. 성장과 번식의 가능성은 상상에 맡기더라도 소통의 가능성은 남겨둘 수 있지 않을까. 도킨스R. Dawkins가 지은 라는 책에 따르면, 태초에 지구상에 있던 분자들 가운데 일부는 거대 유기물로 발전하고 이중의 일부에게 자기 복제 능력이 생겼다. 이러한 자기 복제 능력을 가진 분자들은 점차 스스로 사는 틀, 즉 생존 기계를 갖추게 된다. (도킨스는 이를 세포의 형성 과정이라 하며, 자기복제 분자를 유전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생존기계의 구조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번식하고 생존하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로부터 복잡한 세포집합으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들까지, 그리고 명령체계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에 까지 해당된다. 인간을 포함해서 지금껏 살아남은 지구상의 생존기계들이 자기 번식이라는 이기적인 목표 아래 얼마나 배타적인 결정을 내리며 혹은 잔인하기까지 한 행동들을 취하며 생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번식과 의사소통 능력이 있는 성인 침팬지와 미숙한 태아가 가지는 법적 지위를 비교해보라. 어떤 면에서 인간들의 기준은 독단적이며 가차 없다.) 아시모프I. Asimov가 제안한 로봇의 삼 원칙 중 제 일 원칙이 인간을 해치지 못하는 것이듯이, 인간은 스스로가 개발해낸 비교적 최근에 새롭게 나타난 존재인 로봇과 같은 기계들에 대해서도 이기적인 기준을 고수하고 있다. 그들이 인간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가치있는 존재라는 점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제적으로 개개인의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다. 우리는 지구 건너편의 아흔 살 먹은 노인의 죽음보다는 기르던 애완견의 죽음에 더 슬퍼한다. 나아가 오랫동안 곁에서 동거동락했던 자동차 같은 기계와 감정을 교류하는 듯한 느낌을 가지기도 하지 않는가. 노진아는 그 첫 개인전부터 인간이 되고 싶어서 인간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하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반어적으로 인간 스스로가 기계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동시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되곤 했다. 2005년 정미소에서 보였던 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났듯이, 그 관계의 중심에는 인간과 기계 혹은 생명 자체에 대한 철학적 기준에 대한 고민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노진아는 이러한 고민이 밑바탕이 된 개념틀을 가지고 작업해 왔으며, 이 개념틀에는 도킨스의 생존기계처럼 새로운 인식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미생물未生物을 통해서 인간으로서 모든 존재에 대해 우월한 입장에서 기계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해 회의적으로 혹은 애정을 가지고 다시 질문을 던질 것을 종용하고 있다. 기계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일종의 동경과 불안의 양면을 숨기지 않는 노진아의 질문은 예술의 파타피지크다운 측면이 지니는 특권으로도 보인다.
“오늘 원자들이 만들어지는지 내기할까?”
“아니 원자들이라니! 나는 그 반대에 걸겠어.”
… 학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각각의 양자 주위에 전자들이 윙윙거리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지요.
거대한 수소 구름이 우주 공간에 응축되고 있었습니다.
“보았어? 원자들로 가득차있다고!”
-이탈로 칼비노I. Calvino의 중에서 전시 서문 –